2개의 댓글

녹색당 창당

언론의 관심은 참 미미하다. 월요일이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메이저 신문사에서는 유일하게 경향신문에서 기사를 냈다.

http://media.daum.net/politics/assembly/view.html?cateid=1018&newsid=20120304221409159&p=khan

그 자리에 함께 할 수 있었다면 어떤 심정이었을까. 뜬금없이 ‘당원’이 된 이유.. 독일에서 녹색당의 영향력과 그 혜택을 피부로 느껴왔다는 점, 그들이 지향하는 가치관이 가장 나의 신앙관 및 내가 이상적으로 지향하는 삶의 방향과 가장 일치한다는 점 등등을 굳이 들 수 있겠지만… 나도 잘 모르겠다. 사실 나는 내가 그 이상으로 바라고 지향하는 바대로 생활하고 있지도 않다. 그냥 소박하고 순진한 심정이었다. 정치라는 것 잘 모르고, 관련된 활동을 한 적도 없고 앞으로도 내가 할 수 있는 게 있는지도 모르겠지만, 하다못해 조그마한 당비라도 보태고 싶었던 그런 심정. 뭔가, 현대 사회에서 한 없이 좋은 것들로 포장된 그런 숨막히는 것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의 참된 사람의 얼굴을 보고 싶었던 심정. 우리 아이들은 좀더 인간적이고 행복한 환경에서 자라게 하고 싶은 순박한 부모의 마음.

최근에 관련 공부 좀 하려고 녹색평론에서 나온 글들을 조금 훑어보았는데, 사람들의 문제의식은 역시 크게 다르지 않구나라고 느낀 점도 있고, 새롭게 배운 것도 있다. 예를 들어, 세계화라는 말로 포장된 종속화되고 획일화된 사회에서 어떻게 살 것인가를 논하는 면들은 요 밑에 올려놓은 독일 신학자 몰트만이 제기한 문제의식과 매우 유사한 논조들이다.

어쨌거나, 감사하다.

2개의 댓글

과학자들

과학이나 과학자들에 대한 대표적인 선입견은 주로 과학은 객관적이고, 가치 중립적이고, 과학자들은 똑똑하고 합리적일 것이라는 생각이다. 편견이다. 오늘날의 대학과 과학자 사회에서 과학자들은 합리적이 되도록 훈련받는 것이 아니라, 문제풀이 잘하는 기능인이 되도록 훈련받는다.

특정 문제 풀이에는 가치 판단의 개입의 여지가 없을 수 있다. 1+1 =2 에는 그 어떤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될 필요가 없다. 하지만, 1+1이라는 문제를 푸는 능력은, 합리적인 가치 판단과는 상관이 없는 경우가 많다. 최근 서울 시장 아들의 병역 문제를 둘러쌓고 일부 의사들이 내놓은 판단들이 그 예이고, 여전히 창조과학을 지지하는 명문대 출신 과학자들이 그 예이다. 사람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매우 분열적이어서, 자신의 전문 분야에서는 매우 날카로운 판단력을 지닌 사람들이 종교의 문제나 혹은 정치적 이념의 문제에서는 단순 무식하기 이를 데 없는 바보가 되는 경우가 너무나 흔하다.

또 다른 예를 든다면, 핵 발전에 종사하는 과학자들에게 핵 발전의 안전성과 경제성에 관한 올바른 판단을 기대할 수 있을까?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일반적으로는, 나는 그게 어렵지 않을까 싶다. 단순히 이것이 그들의 밥벌이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이것은 자신들이 힘들게 쌓아 올려놓은 정체성의 문제이다. 이건 마치, 교회 개혁을 대부분의 목사들에게 기대할 수 없는 것과도 마찬가지이다. 목사들이 그 개개인의 성품은 열린 마음을 가지고 있고 개개인의 인간 관계에서는 설사 합리적이라도, 자신들의 삶과 정체성 및 자존심의 문제가 깊숙히 연관된 문제에서 객관적인 판단을 하리라고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목사들 사회가 상당히 게토적이라는 데서도 이는 확인된다. 과학자들도, 이런 목사들과 다를 바가 전혀 없다. 각각의 과학자 집단은 꽤나 게토적인 성격을 띄고 있고, 그들도 합리적이지 못한 그냥 연약한 인간일 뿐이다. 그렇기에 어떤 특정 문제에는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사람들이 항상 필요한 것이다.

대학에서의 과학 교육은 커리큘럼의 수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예를 들어, 모든 이공계생들에게 과학철학과 과학사를 전공 필수 과목으로 공부하게 만드는 것이 적어도 최소한의 필요 조건이 아닐까 싶다. 자기들이 도대체 무엇을 위해 문제풀이 훈련을 받고 있는지 한 번쯤 돌아볼 기회는 주어야 할 것이다.

댓글 남기기

우리를 양육하는 것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요즘 새롭다. 별이 덕분이다. 별이 나이 때 나는 어떻게 지냈더라. 이렇게 자꾸 생각하다보니..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는 아마 돌도 되기 전, 유모차에 앉아 있을 시절인데, 앞에 뭐가 보였는지는 기억이 없고 형이 나를 향해 웃었던 웃음 소리가 생각난다. 물론 그 짧은 5초간의 기억이 전부다. 그리고 나서는 아마도 만 3-4살 이후, 집에서 기르던 개와 마당에서 놀던 일, 엄마에게 떼쓰면서 울던 일, 아빠가 퇴근하신 후에 나를 안고 동네 수퍼마켓에 과자를 사주러 가시던 일, 누나와 다투던 일.. 이런 기억들이 있다.

돌이켜 보면 나를 양육한 사람은 단순히 우리 부모님이 아니었다. 같이 놀던 동네 친구, 누나와 형이 학교에 간 동안 내가 심심하지 않게 같이 놀아준 우리 집 개 해피, 휴가철에 만나 함께 놀던 사촌 혹은 친척들, 동네 놀이터에서 흙 장난을 하며 어울렸던 이름 모를 아이들, 한 여름날 마당에서 열심히 양식을 나르면서 나의 흥미로운 관찰거리가 되어준 개미들,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는 모습으로 무료함을 달래는 장난감이 되어준 개나리 잎.. 그 모두가 나의 양육자들이었다.

가난한 동네 아이들이 등하교길에 자기들 아파트 단지를 통과하며 다니는 것을 꺼려한다는 타워팰리스의 부모들 이야기. 너무나 끔찍하다. 돈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있기에 자기 아이들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혼자서 잘 자랄 수 있으리라는 착각. 타워 팰리스 아이들을 양육하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키우는 것은 결국 그 부모들이 멸시하는 그 아이들이라는 매우 기본적인 상식을 애써서 무시하는 자아 분열..

오늘도 피곤해서 건성으로 별이와 놀다가 억지로 재우고 난 후 느끼는 것은, 결코 부모들 혼자서는, 설사 경제적 능력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이, 그리고 자연이,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다 필요하다. 그렇기에 별이 주변에 있는 모두에게, 심지어 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길거리의 고양이들과 잔디밭의 민들레 꽃씨에게도 나는 존경과 감사함을 느껴야 마땅하고, 그들과 우리가 하나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정상일 것이다. 이 분열적 사회에서, 이것은 매우 지키기 어려운 신앙과 같은 것이 되어가고 있다. 순교자적, 혹은 수도자적인 삶을 통해서만 가능해진.. 믿음 없는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했던 복음서의 그 누구처럼 그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다.

댓글 남기기

작은 씨앗

내가 작년에 한 일 중에 잘한 일 하나가 있다면, 녹색당에 가입한 것이다 ( http://kgreens.org/). 지금은 외국에 있기 때문에 당 구성 요건이라는 5000명 채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작은 씨앗 하나 뿌리는 심정이었다.

오늘 경향 신문에 나온 김종철님 인터뷰: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201201101732431&pt=nv

그와 녹색평론이 표방해온 것은 생태주의와 소농공동체다. 인간 생존의 자연적 토대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다는 인식에서 농업 중심 사회의 재건과 생태적·사회적 위기와 모순의 척결을 말해왔다. 기성 정당의 틀로서는 이런 목표가 성취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저는 진보신당이 현존하고 있는 정당 중에서 가입할 만한 거의 유일한 정당이라고 봅니다. 그런 정당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활동해서 힘을 키우는 게 낫지 않으냐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아니라는 게 제 생각이에요.

진보신당도 결국은 계급정당이잖아요. 계급운동을 통해서 말하자면 사회주의적인 사회를 실현하려는 것인데, 거기에는 전제가 있어야 돼요. 바로 산업 발전이에요. 산업노동자 세력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산업이 발전돼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안 할 수 없는 것이죠. 결국 화석연료에 기반을 두고 있는 지금의 이 산업시스템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요. 녹색당과는 이슈별로 연대할 수 있겠지만 근본 출발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공생공락의 가난,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지향하고 성장을 그만 하자고 하면 대중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제 얘기가 그거예요. 당위성이나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현실적으로 그런 세월이 온다는 거죠. 그것도 당장…. 50년 후, 100년 후가 아니고 10년 안에 옵니다. 준비를 안 하면 북한이 1990년대 당했던, 대거 굶어죽는 사태가 일어나는 거죠.”

백낙청 교수의 ‘적당한 성장론’이나 최장집 교수의 ‘정당정치 강화론’ 등에 대해서 굉장히 논쟁적인 반론을 제기한 것도 그래서였군요.

“그분들이 저와 거리가 없는 대가들이죠. 기본적으로 화석연료 시대가 끝난다는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기존의 정당정치는 한마디로 자기가 속하고 있는 계층이나 계급의 이익에 따라서 국가 예산을 배분하기 위해서 국회에서 논쟁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앞으로 경제성장이 안 되면요, 그렇게 갈라먹을 국가 예산이 없습니다. 지난 200년 내지 300년 동안 이른바 근대 정당정치를 뒷받침했던 경제·사회구조가 지금 무너지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전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보통 사회과학자들이 서로 논쟁하는, 그런 수준이 아닌 거죠.”

댓글 남기기

생명

새 해를 함석헌님의 글로 시작하고 있다. 마음의 굳은 때를 씻는 글은 정말 오랜만이다. 정결케함은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생명에 대한 사랑은, 신과 연합하는 생명의 자람과 미래의 개방성을 긍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에서도 깊이 보면 하나님도 자라는 하나님일 것이다. 절대고 보면 그 속에 변도 불변도 다 있을 것 아닌가? 변과 불변이 합하면 자람이다. 변하면서도 변치 않는 것, 변치 않으면서도 자꾸 변하는 것, 그것은 자라는 자다.

우주는 움직이는 우주요, 인생은 자라는 인생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되자는 이, 되어가고 있는 이다. 완성의 천당, 안식의 하나님, 적멸의 부처를 믿는 보수주의, 지배주의, 통치주의의 묵은 술에 취한 종교가는 그 귀족주의에 젖은 눈에 채 되지 않은 미완성 하나님은 아주 점잖지 못한 부정자, 파괴자로 뵐 것이요, 이런 말을 들으면 악이 털 끝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뉘 하나님이 이기나 보자! 모세가 하나님더러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자기는 이름이 없고 “있어서 있는 자”라 했다. “나는 나다 하는 자다 (I am that I am)”하는 뜻이다. 그것은 더 똑똑히 말한다면 차라리 “나는 있으려는 자로 있으려는 자 (I shall be I shall be)”라는 뜻이다.

생명은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 변하지 않기 위해 변하는 것이다. 많으면서도 하나인 것, 많으므로 하나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하면서도 구절이 있다. 그것이 시대란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가 나타내는 뜻이 말씀이다.

생명은 대듦이다. 맞춰 감으로만 보면 생명은 순전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생명은 결코 수동이 아니다. 맞추어 가려는 성질 밑에는 힘있는 능동적인 것이 늘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전한 받아들임만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무생물밖에 있을 수 없다. 맞추어 간다는 것은 사실은 밖에서 오는 힘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힘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생명은 대듦이라고 보아여 옳다. 변하는 가운데서 변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생명이다. 생명은 자기 주장이다. 나는 나대로 하자는 힘이 생명이다. 온 세계에 대하여 나는 나다, 나는 너와는 다르다 하는 것이 생명이다…. 늘 변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또 돌변하려 하는 것이 생명이다. 진화는 여기에서 나왔다.

현재만이 산 것이다. 미래라는 것도 내 것이 아니요, 과거란 것도 이미 내 것이 아니요, 내가 자유로 할 수 있는 것은 현재만이다. 현재만이 산 것이다. 생명은 현재에만 있다. 참 시간이란 것은 현재만인데, 현재란 것은 생명에만 있는 것이다.

악이 무엇인가? 생명 죽이기 좋아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산 고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앞으로 온전히 새로운 것이 올 것을 미리 그리지 못하면서 도덕 도덕 하는 사람들은 말은 옳으면서도 사람을 죽인다. ‘역사적 내다봄’이 없이는 도덕은 한갓 가두는 틀이요, 홀치는 올가미다. 나무의 자람이 순 끝과 겉껍질에 나와 있으며, 동물의 신경이 기관 끄트머리에 나와 있듯이 우주의 삶은 역사의 제일선에 있다. 옳고 긇고를 결정하는 것은 살리느냐 죽이느냐에 있는데, 살고 죽는 것은 산호의 가지 끝 같은 시대의 움직여 가는 끝에 나와 있지, 다 굳어진 틀거리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아무리 산호같이 훌륭해 보여도 살고 남은 찌꺼기에 지나지 않느다.

역사는 자라는 것이고, 자라기 때문에 변하고, 변해가는 것이기 때문에 금새가 나타나는 것인데, 금새가 보이면 말씀이 온다. 모든 새대는 제 말씀을 가졌다.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이 예언자다. 하나님은 말씀하지지만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옮기는 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예언자다. 그러나 또 그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씨알, 곧 민중을 대신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권세잡은 자에게 있지 않고 씨알에게 있기 때문이다.

댓글 남기기

종의 마음, 아들의 마음

열린 마음은 어떤 마음이고 닫힌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먼저 먹은 술이 좋다 해서 새 술은 입에 대지도 않으려는 것이 닫힌 마음이요, 진리에다 무한성을 허락해서, 내 아는 것은 요것이지만 그 밖에도 얼마든지 넓은 것이 있을 것이다 하여, 새로 더 배울 생각을 하는 것이 열린 마음이다. 하나는 종의 마음이요, 또 하나는 아들의 마음이다. 하늘나라를 지키잔 것은 종이요, 하늘나라를 내 마음대로 쓰잔 것은 아들이다. 종놈들은 문간에서 지켜라. 우리는 마음대로 뒤져 그 속을 알고 불편이 있으면 고치고 부족하면 더 지으면서 살리라!

함석헌

댓글 남기기

로렐라이의 단풍

10 – 28 – 2011

DSC_0091

DSC_0078

DSC_0058

DSC_0048

DSC_0030

팔로우

모든 새 글을 수신함으로 전달 받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