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해를 함석헌님의 글로 시작하고 있다. 마음의 굳은 때를 씻는 글은 정말 오랜만이다. 정결케함은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생명에 대한 사랑은, 신과 연합하는 생명의 자람과 미래의 개방성을 긍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에서도 깊이 보면 하나님도 자라는 하나님일 것이다. 절대고 보면 그 속에 변도 불변도 다 있을 것 아닌가? 변과 불변이 합하면 자람이다. 변하면서도 변치 않는 것, 변치 않으면서도 자꾸 변하는 것, 그것은 자라는 자다.
우주는 움직이는 우주요, 인생은 자라는 인생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되자는 이, 되어가고 있는 이다. 완성의 천당, 안식의 하나님, 적멸의 부처를 믿는 보수주의, 지배주의, 통치주의의 묵은 술에 취한 종교가는 그 귀족주의에 젖은 눈에 채 되지 않은 미완성 하나님은 아주 점잖지 못한 부정자, 파괴자로 뵐 것이요, 이런 말을 들으면 악이 털 끝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뉘 하나님이 이기나 보자! 모세가 하나님더러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자기는 이름이 없고 “있어서 있는 자”라 했다. “나는 나다 하는 자다 (I am that I am)”하는 뜻이다. 그것은 더 똑똑히 말한다면 차라리 “나는 있으려는 자로 있으려는 자 (I shall be I shall be)”라는 뜻이다.
생명은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 변하지 않기 위해 변하는 것이다. 많으면서도 하나인 것, 많으므로 하나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하면서도 구절이 있다. 그것이 시대란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가 나타내는 뜻이 말씀이다.
생명은 대듦이다. 맞춰 감으로만 보면 생명은 순전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생명은 결코 수동이 아니다. 맞추어 가려는 성질 밑에는 힘있는 능동적인 것이 늘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전한 받아들임만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무생물밖에 있을 수 없다. 맞추어 간다는 것은 사실은 밖에서 오는 힘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힘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생명은 대듦이라고 보아여 옳다. 변하는 가운데서 변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생명이다. 생명은 자기 주장이다. 나는 나대로 하자는 힘이 생명이다. 온 세계에 대하여 나는 나다, 나는 너와는 다르다 하는 것이 생명이다…. 늘 변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또 돌변하려 하는 것이 생명이다. 진화는 여기에서 나왔다.
현재만이 산 것이다. 미래라는 것도 내 것이 아니요, 과거란 것도 이미 내 것이 아니요, 내가 자유로 할 수 있는 것은 현재만이다. 현재만이 산 것이다. 생명은 현재에만 있다. 참 시간이란 것은 현재만인데, 현재란 것은 생명에만 있는 것이다.
악이 무엇인가? 생명 죽이기 좋아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산 고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앞으로 온전히 새로운 것이 올 것을 미리 그리지 못하면서 도덕 도덕 하는 사람들은 말은 옳으면서도 사람을 죽인다. ‘역사적 내다봄’이 없이는 도덕은 한갓 가두는 틀이요, 홀치는 올가미다. 나무의 자람이 순 끝과 겉껍질에 나와 있으며, 동물의 신경이 기관 끄트머리에 나와 있듯이 우주의 삶은 역사의 제일선에 있다. 옳고 긇고를 결정하는 것은 살리느냐 죽이느냐에 있는데, 살고 죽는 것은 산호의 가지 끝 같은 시대의 움직여 가는 끝에 나와 있지, 다 굳어진 틀거리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아무리 산호같이 훌륭해 보여도 살고 남은 찌꺼기에 지나지 않느다.
역사는 자라는 것이고, 자라기 때문에 변하고, 변해가는 것이기 때문에 금새가 나타나는 것인데, 금새가 보이면 말씀이 온다. 모든 새대는 제 말씀을 가졌다.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이 예언자다. 하나님은 말씀하지지만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옮기는 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예언자다. 그러나 또 그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씨알, 곧 민중을 대신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권세잡은 자에게 있지 않고 씨알에게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