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장. 신학의 위치와 방법론
요약: 18세기 이후 종교라는 개념을 신에 관한 지식의 원천으로 여기는 경향이 나왔다. 슐라이어마허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종교는 인간의 체험과 활동이기에 종교를 신학의 시발점으로 삼는 것은 인류학을 신학의 근거로 삼는 것과 같다. 이에 대한 반응으로서 20세기 초에 에리히 셰더와 칼 바르트를 중심으로 신중심적 논증을 시도한다. 바르트는 초기에 개인적 결단을 통해 신중심적 태도에 이를 수 있다고 했지만, 개인적 결단도 결국 주관적인 문제이기에 인간중심적 위치로 귀결된다. 후기에 바르트는 교회의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를 통한 신중심적 위치를 확보하고자 했으나, 이는 결국 신학적 전제를 받아들이는 문제이고, 또 다시 개인적 결단의 문제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신중심적 위치를 확보하는 것은 논증을 통한 길을 택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그 논증의 출발점은 인간 현상으로서의 종교가 되어야 할 것이다. 특정 종교의 하나님에 관한 주장들이 얼마나 일관성있으며 인간의 체험에 부합하고 자연과 역사를 잘 설명할 수 있는가?
질문:
18세기에 종교를 신학의 원천으로 삼은 것과, 판넨베르그가 논증의 출발점으로 종교를 취하는 것. 뭐가 다르지?
다시 요약:
기독교에서는 첫째, 해석학적 작업, 둘째, 진리라는 개념의 명료화가 필요하다. 진리의 판단 기준은 일관성이어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주장들이 그럴듯할 수 있으려면 인간의 삶과 이 세상의 실재의 모든 면과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관성을 테스트할 수 있을 것인가? 기독교의 신론, 창조론, 그리고 인간의 역사에 관한 기독교의 교리를 “구원의 역사”로서 조직적으로 제시하는 것을 통해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를 위해서는 세상과 인간의 모든 측면이 신과 관련해서 재해석 될 필요가 있다. 이런 재해석은 결코 주어진 데이타에게 폭력을 가하는 방식이어서는 않되지만, 전용되어질 수는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조직적 해석은 진리를 확증하지는 못한다. 신학은 가설적인 구성에 머문다. 종교적이고 신학적인 진술은 그 선언에 있어서는 매우 확신에 차 있지만 논리적으로 가설적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의 진리 주장을 진지하게 받아들일 수 있는 중요한 조건이다.
과학과 신학은 어떻게 비교되는가? 신학은 과학처럼 실험으로 테스트될 수 없다. 신학은 반복적인 사건에 관한 규칙을 말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논평:
흔히 “과학 = 법칙에 관한 학문” 이라는 식으로 생각하곤 하는데 매우 잘못된 편견이다. 과학은 반복적인 현상, 혹은 법칙에 관한 것만을 다루지 않는다. 빅뱅 우주론, 진화론. 이는 반복적인 현상이 아닌 비가역적이고 종종 반복될 수 없는 종류의 역사를 다룬다. 그리고 이런 역사를 다루는 이론은 관측을 통해 테스트될 수 있다. 판넨베르그도 과학의 이런 측면을 잘 알고 있는 듯 한데, 여기서 굳이 규칙성이나 법칙에 관한 면을 유달리 강조할 필요는 없었다.
별아빠님 잘 봤어요. 궁금한 게 있는데요, 과학이 그런 비가역적이고 우연적 현상을 그냥 내버려두진 않지 않나요? 어떤 방식으로든 원인을 찾거나 수학화(?)하거나 메타법칙을 찾거나요. 어째서 법칙에 관한 학문인 것이 아닌지, 좁은 의미에서 그렇지 않다는 뜻이신지 몹시 궁금하네요. 제가 못 보는 다른 면을 보고 계신 것 같아 질문드립니다~
물론 법칙성, 패턴, 개연성 등이 비가역적, 우연적 현상을 포함한 모든 자연 현상에 대한 경계 조건을 제공하기에 매우 중요합니다. 과학의 많은 분야는 그래서 바로 이 경계조건 자체에 천착하는 것도 사실입니다. 반면에 넓은 의미에서는, 우연으로 보이는 현상 자체에 대한 원인은 많은 경우 규명할 수 없겠지만 (예를 들어 왜 빅뱅이 일어났는가. 왜 진화의 방향은 이러 저러했는가, 왜 하필 이러 저러한 돌연변이가 발생했는가. 등등. ), 다양한 우연적 현상들이 우주나 진화의 역사에 초래한 과정들을 과학적 법칙이나 혹은 “패턴”, 혹은 “개연성”이라는 경계조건을 동원하여 해석하고 이해하려고 시도하는 것도 과학의 중요한 부분입니다. 물론 항상 그 경계조건 안에 머무는 것은 아니지요. 최근 빛의 속도 보다 빠른 입자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어떤 현상이 그 경계를 넘었다고 보일 경우에는 얼마든지 그 경계를 다시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어쨌거나 우주론이나 진화론은 단순히 어떤 패턴이나 규칙성을 찾고자 하는 이론이 아니라, 오늘 관찰할 수 있는 과거의 흔적을 통해 과거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역사를, 주어진 경계조건을 토대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라고 말할 수 있겠지요. 이런 경계 조건이 없다면 과학이 성립할 수 없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하지만, 제 주장은 그 자체가 모든 과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물리학하는 사람들 중에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 천문학에서는 특히 더 그러합니다. 마찬가지로 판넨베르그가 말한 ” all determining reality” 라는 것이 바로 그가 종교 현상의 경계 조건으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만.. 요즘 시간이 없어서 이 책을 계속 읽지 못했네요..
“오늘 관찰할 수 있는 과거의 흔적을 통해 과거에 어떤 일이 벌어졌는가 하는 역사를, 주어진 경계조건을 토대로 재구성하는 작업”이라는 부분에서 ‘자연의 역사’에 대한 긍정, ‘과학에서의 조직(신학)적 면모’ 등이 읽히는데 맞는지 모르겠네요. 매우 흥미진진합니다. 물론, 판넨베르크가 ‘과학=규칙성’이라는 함수 위에서 과학과 대화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동시에 자연의 역사성을 긍정했던 과학과도 대화했다는 점도 함께 고려되어야 할 것 같습니다. 규칙성에 천착하는 과학적 측면에 대해 선긋기를 한 것 같고요, 규칙성으로 총괄할 수 없는 오늘날의 자연과학을 끊임없이 수용하였고요. 아무튼 제 인식의 채널이 한단계 넓어진 느낌입니다. 또한,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을 “종교 현상의 경계 조건”으로 이해하신 측면은 가히 압권입니다. 이 문제는 더 많은 숙고를 필요로 하는 일이지만 어쨋든 앞으로 제가 이 용어를 언급할 때는 별아빠님에게 항상 빚지고 있게 될 것 같네요.
contingency라는 말 때문에 판넨베르그에게 관심이 갔어요. 근데 자연의 역사에 대한 긍정이라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요? 그리고 all determining reality는 신을 지칭하는 말이던데, ‘실재’ 대신 ‘현실성’이라고 말하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어쨌든 가르침 많이 주세요.
‘자연의 역사’는 판넨베르크가 즐겨 사용하는 용어였는데 그 자신의 것은 아니고 하이젠베르크와 보어의 학생이었던 이론물리학자 바이체커에게 영향을 받은 듯 합니다. C.F.von 바이체커는 (일반적으로 물리학에서 역사란 개념이 그로테스크적 결합임에도 불구하고) 시간 안에서 일어난 사건 전체로서의 역사를 재구성하려고 시도했었고, 그에 따라 철학이나 신학과 자유로운 대화를 했던 인물이었죠. 이미 잘 아실거라 생각됩니다. 그런 측면에서 말씀하신 부분이 그런 느낌과 인상을 주었습니다.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이란 번역은, 원문으로는 die alles bestimmende Wirklichkeit인데요, 이것도 판넨베르크의 것은 아니고 불트만의 것일 겝니다. ‘전능신’에 대한 대체용어였죠. 아마도 불트만에게서는 비신화화 이후 생존 가능한 신개념을 상정했겠지만, 판넨베르크에게서는 더 포괄적이고 역사적이며 종말론적인 개념으로 확장된 것 같습니다. 여기서 영어로 번역된 reality는 독일어로 Wirklichkeit인데요, 실재, 현실, 현실성 등으로 다 번역 가능합니다만, 현실이란 말을 선호하는 이유는, Wirklichkeit가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태 개념과 상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가 순수현실태actus purus로서 신을 생각했던 것과 연관되면서도 미래에 대한 개방성 속에서 확장된 개념이 ‘모든 것을 규정하는 현실성’일 겁니다. 그리고 이 현실 개념은 우연contingency 개념의 정의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요.
바이체커에 대한 말은 처음 들어요. 보어의 제자라면 한참 옛날 사람이네요. 하긴, 우주의 역사라는 말은 오늘날 과학에서는 매우 당연한 말이지만, 빅뱅 우주론이 발전한 20세기 중반 이후에나 자주 사용된 말이니까, 그 전 물리학자들에게는 생소한 개념이었을 수도 있겠네요. 오늘날에도 꽉 막힌 채로 물리학하는 양반들이 있긴 하지만
현실태라는 말. 신 개념을 이렇게 말하는게 제게는 참 신선하네요. 이해하는 데 도움이 많이 되겠어요. 여러 모로 고맙습니다.
배우러 왔다가 엉뚱한 말만 늘어놓은 거 같아 좀 송구스럽습니다.
과학도들에게서 많이 듣고 싶습니다.
직접 들으면 더 없이 좋겠는데요,
사실 박사니 포닥이니 교수급중에서도
이런 대화가 거의 불가능한 경우가 많았어요.
이것도 하나의 경향일까요, 관점의 차이일까요…
각자 자기 연구 자체로도 충분히 바쁜 것도 원인이겠죠.
앞으로도 종종 잘 부탁드려요~
곰곰히 생각해 보니 물리학하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은 천문학자들하고는 참 달라요.. 송구하시다니요. 말도 안돼요. 저는 이런 식이 아니면 배울 기회가 없어요. 짐작하시겠지만 저도 주변의 목사나 신학생들하고는 이런 대화가
불가능한 경우가 많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