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모든 사람이 넉넉하다! 이것은 사도행전이 전해 주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우리의 세상, 통일된 독일을 살펴보면, 바로 정반대의 원칙이 우리의 생활, 우리의 충동, 우리의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곳곳마다 “넉넉하지 못하다”고 아우성이다. 우리의 경제는 결핍의 경제이다. 어디나 온통 결핍뿐이어서, 오직 더 많은 노동과 생산 증대, 더 많은 생산만이 이 결핍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이 우리의 전제가 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전혀 넉넉하지 못하다. 그래서 석유를 둘러싸고 싸운다. 그래서 자원을 놓고 싸운다 그래서 세계 시장을 장악하려고 싸운다. 그래서 교육의 기회와 일자리를 얻으려고 싸운다. 그래서 돈과 향략을 향해 끊임없이 사냥한다… 왜 그런가? 현대 사회의 인간이 실로 게걸스런 비인간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진정시킬 수 없는 생명욕이 그를 괴롭힌다. 그는 채울 수 없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다.
현대인들은 왜 이렇게 변질되었는가? 그것은 현대인들이 알게 모르게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명욕은 실로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죽음에 대한 그들의 공포는 끝없는 권력욕 안에 잠재되어 있다. “인생은 오직 단 한번이다”는 말이 있다. “중요한 것을 놓칠지도 모른다.” 향락과 소유, 권력에 대한 목마름, 성공과 칭찬을 통하여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 이것은 현대인들의 왜곡 현상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불신앙이다. 하나님을 상실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신으로 만든다. 이리하여 인간은 불행하고 교만스로운 작은 신(mini-god)이 된다.
“모든 사람이 결코 넉넉하지 못하다. 그러니 손을 내뻗어라. 지금 손을 내뻗어라”고 죽음이 말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삼켰을 때, 죽음은 우리를 삼킨다. 현대의 결핍 경제, 현대의 성장 이데올로기와 확대 욕망은 죽음과의 결탁이다. 이것은 인간의 공포를 가지고 노는 치명적인 놀이다.
모든 사람이 전혀 넉넉하지 못하다. 이 구호는 모든 인간 공동체를 깨부수며, 민족과 민족의 대립, 만인과 만인의 대립, 자기 자신과의 대립을 부추긴다. 이 공포의 구호는 인간을 고립시키고, 근본적으로 서로 원수가 되는 세상 속으로 내몬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전진하지 않는 사람, 뒷걸음치는 사람의 탓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각자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이것은 참으로 “마음도 없고 영혼도 없는” 세상, 서로 물고 뜯는 사회이다.
마지막으로 치명적인 생명욕과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부터 생겨나는 현상은 실로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 인구의 10 퍼센트는 가난 속에서 살고 있다. 세계에서 7억에 이르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으며, 제 3세계의 백성들은 부채 때문에 파산에 몰리고 있다. 이것은 놀랄 일도 아니고, 자연 재앙도 아니다. 이들이 저개발 상태에 있는 것은 부유한 백성들이 이들을 저개발 상태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이들이 굶주리는 것은 굶주림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더 가난해지는 것은 더 많은 부채를 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자연의 결핍이 아니라 다란 사람의 불의, 재화의 불공평한 분배, 부당한 물가, 불평등한 생활 기회이다.
물론 인간은 가난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은 가난과 더불어 살 수도 있다. 가난도 함께 나누면 견딜 수 있다. 결핍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불의이며, 가난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권리 박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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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임재한다. 그는 성령 안에 임재한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로서 우리의 생명 안에 임재한다. 무한하고 영광스럽고 영원한 그의 생명이 제한받고 상처 입기 쉽고 죽어야 할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고 침투한다. 모든 영적 지식, 모든 감정적 흥분, 육체의 모든 욕구와 충동과 함께 우리는 용납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 우리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낀다. 우리의 고난 가운데서 그의 고통을 느끼며, 우리의 행복 안에서 그의 복이 우리에게 화답한다.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임재한다. 우리는 그 안에 살고, 기동하며,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체험하고 의식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담담하게 되는지를 깨닫는다. 왜냐하면 공포가 사라지고, 위대한 평안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면, 파괴적인 생명욕도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욕망을 우리의 자연적인 욕구에 국한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인위적인 결핍을 생산했던 권력과 행복의 꿈, “위대하고 큰 세상의 환영”은 더 이상 우리를 유혹하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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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의 제안은 이렇다. 가장 좋은 것은 적절한 크기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며, 서로와 함께 서로를 위하는 공동체 생활을 지향하려는 생각을 강화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전혀 넉넉하지 않다”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고립화하고, 개별화하며,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다.
가난의 반대는 소유가 아니다. 가난과 소유의 반대는 공동체이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부유해진다. 친구와 이웃, 동무와 동지, 형제와 자매로 부유해진다. 공동체로 살아가면, 우리는 대개의 곤경 속에서도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 사람과 이념, 능력과 에너지는 실로 충분하다. 우리의 부유함을 재발견하자. 우리의 연대성을 재발견하자. 공동체를 만들자. 우리의 생활을 우리의 손으로 직접 영위해 나가자. 끝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자들로부터 우리 자신의 생활을 되찾자.
위르겐 몰트만
(생명의 샘/이신건 역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