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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를 양육하는 것들

오랫동안 잊고 지냈던 어린 시절의 기억들이 요즘 새롭다. 별이 덕분이다. 별이 나이 때 나는 어떻게 지냈더라. 이렇게 자꾸 생각하다보니..

내가 기억하는 가장 어렸을 때는 아마 돌도 되기 전, 유모차에 앉아 있을 시절인데, 앞에 뭐가 보였는지는 기억이 없고 형이 나를 향해 웃었던 웃음 소리가 생각난다. 물론 그 짧은 5초간의 기억이 전부다. 그리고 나서는 아마도 만 3-4살 이후, 집에서 기르던 개와 마당에서 놀던 일, 엄마에게 떼쓰면서 울던 일, 아빠가 퇴근하신 후에 나를 안고 동네 수퍼마켓에 과자를 사주러 가시던 일, 누나와 다투던 일.. 이런 기억들이 있다.

돌이켜 보면 나를 양육한 사람은 단순히 우리 부모님이 아니었다. 같이 놀던 동네 친구, 누나와 형이 학교에 간 동안 내가 심심하지 않게 같이 놀아준 우리 집 개 해피, 휴가철에 만나 함께 놀던 사촌 혹은 친척들, 동네 놀이터에서 흙 장난을 하며 어울렸던 이름 모를 아이들, 한 여름날 마당에서 열심히 양식을 나르면서 나의 흥미로운 관찰거리가 되어준 개미들, 빙글빙글 돌며 떨어지는 모습으로 무료함을 달래는 장난감이 되어준 개나리 잎.. 그 모두가 나의 양육자들이었다.

가난한 동네 아이들이 등하교길에 자기들 아파트 단지를 통과하며 다니는 것을 꺼려한다는 타워팰리스의 부모들 이야기. 너무나 끔찍하다. 돈이 있고 사회적 지위가 있기에 자기 아이들은 그들만의 세계에서 혼자서 잘 자랄 수 있으리라는 착각. 타워 팰리스 아이들을 양육하고 건강한 사회인으로 키우는 것은 결국 그 부모들이 멸시하는 그 아이들이라는 매우 기본적인 상식을 애써서 무시하는 자아 분열..

오늘도 피곤해서 건성으로 별이와 놀다가 억지로 재우고 난 후 느끼는 것은, 결코 부모들 혼자서는, 설사 경제적 능력이 어느 정도 있다고 하더라도, 아이들을 제대로 양육할 능력이 없다는 점이다. 우리에게는 다른 사람이, 그리고 자연이, 이 땅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이 다 필요하다. 그렇기에 별이 주변에 있는 모두에게, 심지어 별이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길거리의 고양이들과 잔디밭의 민들레 꽃씨에게도 나는 존경과 감사함을 느껴야 마땅하고, 그들과 우리가 하나일 수밖에 없음을 깨달아야 정상일 것이다. 이 분열적 사회에서, 이것은 매우 지키기 어려운 신앙과 같은 것이 되어가고 있다. 순교자적, 혹은 수도자적인 삶을 통해서만 가능해진.. 믿음 없는 저를 도우소서라고 말했던 복음서의 그 누구처럼 그렇게 속으로 외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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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씨앗

내가 작년에 한 일 중에 잘한 일 하나가 있다면, 녹색당에 가입한 것이다 ( http://kgreens.org/). 지금은 외국에 있기 때문에 당 구성 요건이라는 5000명 채우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겠지만, 작은 씨앗 하나 뿌리는 심정이었다.

오늘 경향 신문에 나온 김종철님 인터뷰:

http://newsmaker.khan.co.kr/khnm.html?mode=view&code=113&artid=201201101732431&pt=nv

그와 녹색평론이 표방해온 것은 생태주의와 소농공동체다. 인간 생존의 자연적 토대가 급속히 붕괴되고 있다는 인식에서 농업 중심 사회의 재건과 생태적·사회적 위기와 모순의 척결을 말해왔다. 기성 정당의 틀로서는 이런 목표가 성취될 수 없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저는 진보신당이 현존하고 있는 정당 중에서 가입할 만한 거의 유일한 정당이라고 봅니다. 그런 정당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활동해서 힘을 키우는 게 낫지 않으냐고 생각할 수도 있어요. 그런데 그건 아니라는 게 제 생각이에요.

진보신당도 결국은 계급정당이잖아요. 계급운동을 통해서 말하자면 사회주의적인 사회를 실현하려는 것인데, 거기에는 전제가 있어야 돼요. 바로 산업 발전이에요. 산업노동자 세력을 중심으로 하기 때문에 산업이 발전돼야 되고, 그러기 위해서는 경제성장을 안 할 수 없는 것이죠. 결국 화석연료에 기반을 두고 있는 지금의 이 산업시스템을 부정할 수 없는 것이라고요. 녹색당과는 이슈별로 연대할 수 있겠지만 근본 출발은 다를 수밖에 없는 것이죠.”

공생공락의 가난, 고르게 가난한 사회를 지향하고 성장을 그만 하자고 하면 대중이 받아들이겠습니까.

“제 얘기가 그거예요. 당위성이나 옳고 그르고를 떠나서 현실적으로 그런 세월이 온다는 거죠. 그것도 당장…. 50년 후, 100년 후가 아니고 10년 안에 옵니다. 준비를 안 하면 북한이 1990년대 당했던, 대거 굶어죽는 사태가 일어나는 거죠.”

백낙청 교수의 ‘적당한 성장론’이나 최장집 교수의 ‘정당정치 강화론’ 등에 대해서 굉장히 논쟁적인 반론을 제기한 것도 그래서였군요.

“그분들이 저와 거리가 없는 대가들이죠. 기본적으로 화석연료 시대가 끝난다는 생각이 없었으니까 그런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기존의 정당정치는 한마디로 자기가 속하고 있는 계층이나 계급의 이익에 따라서 국가 예산을 배분하기 위해서 국회에서 논쟁하는 것이란 말이에요. 앞으로 경제성장이 안 되면요, 그렇게 갈라먹을 국가 예산이 없습니다. 지난 200년 내지 300년 동안 이른바 근대 정당정치를 뒷받침했던 경제·사회구조가 지금 무너지고 있습니다. 근본적인 전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까 보통 사회과학자들이 서로 논쟁하는, 그런 수준이 아닌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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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명

새 해를 함석헌님의 글로 시작하고 있다. 마음의 굳은 때를 씻는 글은 정말 오랜만이다. 정결케함은 생명에 대한 경외와 사랑에서 나온다고 믿는다. 생명에 대한 사랑은, 신과 연합하는 생명의 자람과 미래의 개방성을 긍정하는 것이기도 하다.

종교에서도 깊이 보면 하나님도 자라는 하나님일 것이다. 절대고 보면 그 속에 변도 불변도 다 있을 것 아닌가? 변과 불변이 합하면 자람이다. 변하면서도 변치 않는 것, 변치 않으면서도 자꾸 변하는 것, 그것은 자라는 자다.

우주는 움직이는 우주요, 인생은 자라는 인생이다. 하나님은 영원히 되자는 이, 되어가고 있는 이다. 완성의 천당, 안식의 하나님, 적멸의 부처를 믿는 보수주의, 지배주의, 통치주의의 묵은 술에 취한 종교가는 그 귀족주의에 젖은 눈에 채 되지 않은 미완성 하나님은 아주 점잖지 못한 부정자, 파괴자로 뵐 것이요, 이런 말을 들으면 악이 털 끝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뉘 하나님이 이기나 보자! 모세가 하나님더러 이름을 물었을 때 하나님은 자기는 이름이 없고 “있어서 있는 자”라 했다. “나는 나다 하는 자다 (I am that I am)”하는 뜻이다. 그것은 더 똑똑히 말한다면 차라리 “나는 있으려는 자로 있으려는 자 (I shall be I shall be)”라는 뜻이다.

생명은 변하면서도 변하지 않는 것, 변하지 않기 위해 변하는 것이다. 많으면서도 하나인 것, 많으므로 하나를 나타내는 것이다. 그러므로 변하면서도 구절이 있다. 그것이 시대란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가 나타내는 뜻이 말씀이다.

생명은 대듦이다. 맞춰 감으로만 보면 생명은 순전히 수동적이다. 그러나 생명은 결코 수동이 아니다. 맞추어 가려는 성질 밑에는 힘있는 능동적인 것이 늘 움직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순전한 받아들임만이라면 우리가 말하는 무생물밖에 있을 수 없다. 맞추어 간다는 것은 사실은 밖에서 오는 힘의 지배를 받지 않으려는 힘이 속에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보면 생명은 대듦이라고 보아여 옳다. 변하는 가운데서 변하지 않으려 하는 것이 생명이다. 생명은 자기 주장이다. 나는 나대로 하자는 힘이 생명이다. 온 세계에 대하여 나는 나다, 나는 너와는 다르다 하는 것이 생명이다…. 늘 변하지 않으려 하면서도 또 돌변하려 하는 것이 생명이다. 진화는 여기에서 나왔다.

현재만이 산 것이다. 미래라는 것도 내 것이 아니요, 과거란 것도 이미 내 것이 아니요, 내가 자유로 할 수 있는 것은 현재만이다. 현재만이 산 것이다. 생명은 현재에만 있다. 참 시간이란 것은 현재만인데, 현재란 것은 생명에만 있는 것이다.

악이 무엇인가? 생명 죽이기 좋아하는 것이다.

역사적인 것이 중요한 것이다. 산 고동을 일으키는 것이다. 앞으로 온전히 새로운 것이 올 것을 미리 그리지 못하면서 도덕 도덕 하는 사람들은 말은 옳으면서도 사람을 죽인다. ‘역사적 내다봄’이 없이는 도덕은 한갓 가두는 틀이요, 홀치는 올가미다. 나무의 자람이 순 끝과 겉껍질에 나와 있으며, 동물의 신경이 기관 끄트머리에 나와 있듯이 우주의 삶은 역사의 제일선에 있다. 옳고 긇고를 결정하는 것은 살리느냐 죽이느냐에 있는데, 살고 죽는 것은 산호의 가지 끝 같은 시대의 움직여 가는 끝에 나와 있지, 다 굳어진 틀거리 속에 있지 않다. 그것은 아무리 산호같이 훌륭해 보여도 살고 남은 찌꺼기에 지나지 않느다.

역사는 자라는 것이고, 자라기 때문에 변하고, 변해가는 것이기 때문에 금새가 나타나는 것인데, 금새가 보이면 말씀이 온다. 모든 새대는 제 말씀을 가졌다. 그 말씀을 받은 사람이 예언자다. 하나님은 말씀하지지만 입으로 하는 말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을 옮기는 입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그것이 예언자다. 그러나 또 그는 하나님만이 아니라 씨알, 곧 민중을 대신한다고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권세잡은 자에게 있지 않고 씨알에게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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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마음, 아들의 마음

열린 마음은 어떤 마음이고 닫힌 마음은 어떤 마음인가? 먼저 먹은 술이 좋다 해서 새 술은 입에 대지도 않으려는 것이 닫힌 마음이요, 진리에다 무한성을 허락해서, 내 아는 것은 요것이지만 그 밖에도 얼마든지 넓은 것이 있을 것이다 하여, 새로 더 배울 생각을 하는 것이 열린 마음이다. 하나는 종의 마음이요, 또 하나는 아들의 마음이다. 하늘나라를 지키잔 것은 종이요, 하늘나라를 내 마음대로 쓰잔 것은 아들이다. 종놈들은 문간에서 지켜라. 우리는 마음대로 뒤져 그 속을 알고 불편이 있으면 고치고 부족하면 더 지으면서 살리라!

함석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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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렐라이의 단풍

10 – 28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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쾰른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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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사람이 넉넉하다 (J. Moltmann)

“믿는 무리가 한 마음과 한 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제 재물을 조금이라도 제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거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얻어 그 중에 핍절한 사람이 없으니, 이는 밭과 집 있는 자는 팔아 그 판 것의 값을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매, 저희가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줌이러라.”

모든 사람이 넉넉하다! 이것은 사도행전이 전해 주는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우리의 세상, 통일된 독일을 살펴보면, 바로 정반대의 원칙이 우리의 생활, 우리의 충동, 우리의 경제와 정치를 지배하고 있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곳곳마다 “넉넉하지 못하다”고 아우성이다. 우리의 경제는 결핍의 경제이다. 어디나 온통 결핍뿐이어서, 오직 더 많은 노동과 생산 증대, 더 많은 생산만이 이 결핍을 극복할 수 있다는 신념이 우리의 전제가 되고 있다…

모든 사람이 전혀 넉넉하지 못하다. 그래서 석유를 둘러싸고 싸운다. 그래서 자원을 놓고 싸운다 그래서 세계 시장을 장악하려고 싸운다. 그래서 교육의 기회와 일자리를 얻으려고 싸운다. 그래서 돈과 향략을 향해 끊임없이 사냥한다… 왜 그런가? 현대 사회의 인간이 실로 게걸스런 비인간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진정시킬 수 없는 생명욕이 그를 괴롭힌다. 그는 채울 수 없는 권력욕에 사로잡혀 있다.

현대인들은 왜 이렇게 변질되었는가? 그것은 현대인들이 알게 모르게 죽음에 대한 공포에 지배당하기 때문이다. 그들의 생명욕은 실로 근본적으로 죽음에 대한 공포이다. 죽음에 대한 그들의 공포는 끝없는 권력욕 안에 잠재되어 있다. “인생은 오직 단 한번이다”는 말이 있다. “중요한 것을 놓칠지도 모른다.” 향락과 소유, 권력에 대한 목마름, 성공과 칭찬을 통하여 인정을 받고 싶은 욕망. 이것은 현대인들의 왜곡 현상이다. 이것은 현대인들의 불신앙이다. 하나님을 상실한 사람은 자기 자신을 신으로 만든다. 이리하여 인간은 불행하고 교만스로운 작은 신(mini-god)이 된다.

“모든 사람이 결코 넉넉하지 못하다. 그러니 손을 내뻗어라. 지금 손을 내뻗어라”고 죽음이 말한다. 우리가 모든 것을 삼켰을 때, 죽음은 우리를 삼킨다. 현대의 결핍 경제, 현대의 성장 이데올로기와 확대 욕망은 죽음과의 결탁이다. 이것은 인간의 공포를 가지고 노는 치명적인 놀이다.

모든 사람이 전혀 넉넉하지 못하다. 이 구호는 모든 인간 공동체를 깨부수며, 민족과 민족의 대립, 만인과 만인의 대립, 자기 자신과의 대립을 부추긴다. 이 공포의 구호는 인간을 고립시키고, 근본적으로 서로 원수가 되는 세상 속으로 내몬다. “모든 사람은 자신이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고 사람들은 말한다. 전진하지 않는 사람, 뒷걸음치는 사람의 탓은 자기 자신에게 있다. 각자는 자신의 가장 가까운 이웃이다. 이것은 참으로 “마음도 없고 영혼도 없는” 세상, 서로 물고 뜯는 사회이다.

마지막으로 치명적인 생명욕과 만인 대 만인의 투쟁으로부터 생겨나는 현상은 실로 다음과 같다. 우리 나라 인구의 10 퍼센트는 가난 속에서 살고 있다. 세계에서 7억에 이르는 사람들이 굶주리고 있으며, 제 3세계의 백성들은 부채 때문에 파산에 몰리고 있다. 이것은 놀랄 일도 아니고, 자연 재앙도 아니다. 이들이 저개발 상태에 있는 것은 부유한 백성들이 이들을 저개발 상태로 몰아갔기 때문이다. 이들이 굶주리는 것은 굶주림에 내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이 더 가난해지는 것은 더 많은 부채를 지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고통을 주는 것은 자연의 결핍이 아니라 다란 사람의 불의, 재화의 불공평한 분배, 부당한 물가, 불평등한 생활 기회이다.

물론 인간은 가난 속에서도 살아갈 수 있다. 인간은 가난과 더불어 살 수도 있다. 가난도 함께 나누면 견딜 수 있다. 결핍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것은 불의이며, 가난을 지옥으로 만드는 것은 권리 박탈이다.

……….

하나님은 임재한다. 그는 성령 안에 임재한다. 하나님은 살아있는 자로서 우리의 생명 안에 임재한다. 무한하고 영광스럽고 영원한 그의 생명이 제한받고 상처 입기 쉽고 죽어야 할 우리의 생명을 지탱하고 침투한다. 모든 영적 지식, 모든 감정적 흥분, 육체의 모든 욕구와 충동과 함께 우리는 용납되고,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한다. 우리의 존재 안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느낀다. 우리의 고난 가운데서 그의 고통을 느끼며, 우리의 행복 안에서 그의 복이 우리에게 화답한다. 하나님은 성령 안에서 임재한다. 우리는 그 안에 살고, 기동하며,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을 체험하고 의식하는 사람은 자신이 얼마나 담담하게 되는지를 깨닫는다. 왜냐하면 공포가 사라지고, 위대한 평안이 밀려오기 때문이다.

죽음의 공포가 사라지면, 파괴적인 생명욕도 사라진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우리의 소원과 욕망을 우리의 자연적인 욕구에 국한할 수 있게 된다. 우리에게 인위적인 결핍을 생산했던 권력과 행복의 꿈, “위대하고 큰 세상의 환영”은 더 이상 우리를 유혹하지 못한다.

……….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나의 제안은 이렇다. 가장 좋은 것은 적절한 크기의 공동체를 만드는 것이며, 서로와 함께 서로를 위하는 공동체 생활을 지향하려는 생각을 강화하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전혀 넉넉하지 않다”는 이데올로기는 인간을 고립화하고, 개별화하며, 서로에 대해 무관심하게 만든다.

가난의 반대는 소유가 아니다. 가난과 소유의 반대는 공동체이다. 공동체 안에서 우리는 부유해진다. 친구와 이웃, 동무와 동지, 형제와 자매로 부유해진다. 공동체로 살아가면, 우리는 대개의 곤경 속에서도 스스로를 도울 수 있다. 사람과 이념, 능력과 에너지는 실로 충분하다. 우리의 부유함을 재발견하자. 우리의 연대성을 재발견하자. 공동체를 만들자. 우리의 생활을 우리의 손으로 직접 영위해 나가자. 끝으로 우리를 지배하고 착취하려는 자들로부터 우리 자신의 생활을 되찾자.

위르겐 몰트만
(생명의 샘/이신건 역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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